오늘의 역사 - 카이로 회담 - 1943년 11월 22~26일

카이로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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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22~26일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중화민국의 장제스 세 연합국 수뇌가 모여 열린 회담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대응과 아시아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하여 협의했다. 이 회담에서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최초로 결의하였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단지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식민지 상황을 종결하는 최초의 국제적 합의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단지 귀동냥으로 들어바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통해서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그 배경이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사건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연합뉴스 2013년 11월 22일 기사 조선일보 2015년 8월 5일 기사

하지만, 몇 가지 신문 기사를 보면서 이 사건에 대해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 사실과는 약간 다른다 -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제스에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고, 장제스가 조선의 독립을 회담에서 주장한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2014년 4월 14일 기사 동아일보 2014년 3월 19일 기사

다른 하나는 이승만이 루즈벨트에게 요청하고, 루즈벨트가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장제스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중앙일보 2013년 11월 16일 기사

이러한 다른 시각 때문인지, 아니면 카이로 회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신탁통치에 이은 분단으로 인해 이 회담의 결과에 대한 의의가 없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위키백과에는 위에서 언급한 부분만 나온다.

하지만, 영국의 처질이 인도의 독립 문제와 연관될 수 있는 점을 우려하여 제한한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 라는 문구에 미국과 중국이 동의한 것은 결국 조선의 독립이 자국의 전략적 차원에 의한 결정이라는 것라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카이로 회담의 결과에 대한 임시정부는 처음에는 환영을 하지만, 결국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우려하여 장제스에게 이에 대한 확인 요청한 부분 등 여러 우려를 낳고, 그 우려대로 조선은 미국과 소련이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하여 신탁통치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결국 자강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력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북핵, 중국의 사드 몽니, 트럼트의 통상 압력, 일본의 반성없는 행동을 보면 현재의 한반도가 과연 카이로 회담시보다 얼마나 더 전진해 있는지 의문이 드는 시간이다.

Written on November 22,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