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개범시 화궈펑

양개범시(양개범시)

마오쩌둥이 1976년 9월 9일 세상을 떠났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죽음 이후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에 비판을 보면서 자신의 사후에 동일한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다. 자신의 사후에도 비판하지 않을 인물을 후계자로 선택했는데, 그가 화궈펑이다.

화궈펑은 마오쩌둥 사후에 4인방(왕홍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을 체포하는 성과를 거두고, 당내에서 기반을 다진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지원으로 인해 주석 자리를 차지한 결과로 자신이 마오쩌둥의 실정을 비판할 수 없었다.

1977년 2월 7일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홍기 사설에 양개범시론이라는 주장을 실린다. 이는 화궈펑이 주장한 사상으로 ‘무릇 두가지는 무조건 옳다’라는 뜻으로, 마오쩌둥이 내린 결정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마우쩌둥이 내린 지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마오쩌둥의 지원으로 권력을 얻은 화궈펑으로는 마오쩌둥이 살아 생전에 원하던 일이며,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면서 성장한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받은 많은 많은 원로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내용이었으며,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던 자신의 방향과는 맞지 않는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등소평이 주장한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이라는 실사구시의 주장과 대결하게 된다. 이 실사구시라는 이론은 후푸핑 교수가 1977년 7월 초 양개범시론을 비판하는 주장을 펼치기 위한 이론이었다.

이후 화궈펑은 등소평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1980년 8월 사퇴함으로써 권좌에서 물러났다가 2008년 사망했다.

등샤오핑이 개방을 위한 많은 일을 했으나, 화궈펑이 시작한 일도 많이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사상을 유지해야 했던 한계로 인해서 외연적 확장력이 부족했다. 또한, 등샤오핑과 같은 카리스마가 없었다.

Written on May 15,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