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 일기 -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저자 : 김연수
  • 출판사 : 문학동네
  • 읽은 기간 : 2018. 12. 15 ~ 2018. 12. 16

책

김연수 작가는 장편 소설보다 이런 단편 소설이 더 좋다.

얼마전에 읽은 “바다가 파도의 일이라면”보다는 이런 단편이 더 와 닿는다.

맘에 드는 구절들…

**<푸른 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작가의 일이란 교정하지 않은 초고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정말 여기까지가 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시작하는데 말이다. 그 때 내가 검은색 볼펜으로 대학노트에 뭔가를 긁적였다면 그건 작가의 일이었다기보다는 그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행위였다. 그런데 묘한 것이 글쓰기다. 그녀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노트에 다 쓰고 보니 ‘정말 여기까지가 다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며 문장을 고쳐보려고 한 다스의 볼펜에 포함된 빨간색 볼펜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모든 문장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쓰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귀밑 머리칼에서 풍기던 향내나 손바닥을 완전히 밀착시켜야만 느낄 수 있는 어덩이와 허리 사이의 굴곡 같은 것들을 검은색 볼펜은 묘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볼펜을 쥐는 즉시 머릿속에서 줄줄 흘러나온 검은색 문장들이 아니라 쓰지 못하고 있는 빨간색 문장들을 써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온몸에 남은 오감의 경험을 문자으로 표현해야 할 텐데, 그건 쉽게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아무리 잘 쓴 문장도 실제의 경험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작가의 고통이란 이 양자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했다. 빨간색 볼펜을 손에 들고 괴로워하던 나는 그 고통이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경험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괴로운 것이다. 한 여자와 헤어진 뒤의 나는 그녀를 사랑하던 시절의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빨간색 볼펜을 들고 내가 쓰지 못한 것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작가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빨간색 볼펜으로 검은색 문자을 고쳐썻을 때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 많이 들리는 것 같다. 아마도 개인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쉽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썼겠지만 - 검은 색 볼펜처럼,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닐진데, 자기 경험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는 걸 느끼면 괴로움을 느낀다. 이 괴로움이 해소하고자 더 잘 쓰기 위한 노력이 글쓰기와 관련된 미디어나 서적의 증가로 나타난다 생각한다. 물론, 글로 표현하기 힘들어 사진이나 영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있으면 마치 문맹인 사람들이 글을 배워 자신을 생각을 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닌 글로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 시대 많고 다양한 작가들이 늘어나 사회가 좀 더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나 또한 내 자신의 경험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 더 늘어나기를 바란다.

**<파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서로 날 수 있는 이야기가 저절로 생긴다.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함께 경험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인구가 나다="">**

그는 혀로 바이올린의 혀를 핥았다. 바이올린의 소리는 겉에 칠하는 바니시가 결정했기 때문에 그는 그 맛을 아라야 했다. 소리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표면을 맛봐야만 한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을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이다. 본질은 표면에 있었다.

많은 것들의 본질이 내면 깊은 곳에 있을 거란 편견을 깨부셔 버리는 좋은 문장이다.

혜진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그는 그 굳은살을 어루만졌다. 그건 바이올린 제작자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하는 종류의 살이었다. 그래서 그는 떳떳하게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은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그 순간 그는 직업적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셈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는 그녀의 손을 입 쪽으로 당겨 손가락 끝을 혀로 핥았다. 엄지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새끼손가락까지 순서대로. 천천히 그 맛을 느끼고 또 기억하려고 애쓰며. 어쩌면 표면이 아닌. 더 본질적인 것을 갈망하며.

역시 책은 읽으면서 기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잊혀진다. 이렇게 쓰는 이유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려고 쓰고 있다.

“사월의 미 , 칠월의 솔”이란 단편은 인상 깊은 문장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한 편의 음악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다시 한 번 더 읽어 봐야겠다. 작가의 문장을 더 이해하고, 경험을 더 잘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신선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이런걸 문장이 살아있다라고 표현할려나?

다음에 계속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찾아 볼 것 같다.

Written on January 20,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