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 일기 - 하버드 중국사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하버드 중국사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 윌리엄 T. 로 지음
  • 기세찬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 p568
  • 읽은 기간 : 2020. 09. 05 - 2020. 09. 17

책

P11 대청제국은 현재 중국 본토 지역에 존재했던 왕조 가운데 가장 큰 정치적 실체였다.

원 왕조와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야겠다. 대부분 원이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너무 짧은 기간 동안 지배해서 제외했나?

P11 이전에 중국 왕조로 편입되지 않았던 티베트족, 이슬라교도인 위구르족, 일부 몽골 부족, 남서쪽 변경 지대를 따라 거주했던 버마(미얀마의 옛 이름)인과 타이인, 대만과 그 밖의 변병과 내지의 고지대에서 새롭게 식민화된 지역의 원주민들ㅇ, 그리고 청의 왕좌를 차지한 만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은 거의 북방민족과 다양한 민족들을 흡수해서 국가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청 나라와 같은 수준은 아닐지라도… 더구나 원은 몽골이 주축이 아니었던가..

P23 유럽의 도전과 아시아의 대응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적인 역사는, 유사한 발전 궤적을 따라 지역의 다양한 과정들을 추적하면서 전체 유라시아 대륙의 서로 다른 구성 요소를 강조하는 새로운 역사학의 흐름에 자리를 내주었다. 지금 청은 고립된 예외라기보다는 새로운 통신 기술에 도움을 받은 행정적 중앙 집권화, 계획적인 다민족적 구성 요소, 적극적인 영토 개적의 형태 면에서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 로마노프 왕조, 심지어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들과 대체로 유사했다고 재인식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새로운 유라시아 세력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오래된 ‘유목 문화’를 봉쇄하고 압박했다.

이전에 어디 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네덜란드 상인들이 조선과 통상을 하려했는데, 이는 명 나라가 끝나고, 청 나라가 들어서면서 도자기를 수입하는 길이 막히자, 일본보다는 조선을 통해서 도자기를 수입하기 위해서 통상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일본의 반발과 이후 임진왜란을 통해서 조선에서 납치해간 도공들로 인해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굳이 조선과 통상을 할 필요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해상 무역에서 닫혀 있는 나라가 아니라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후대로 가면서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비용이 증가하여, 해상을 비우는 정책도 펼치지만, 국력이 왕성했을 때는 해상을 통한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었다. 굳이 네덜란드 상인들이 조선까지 와서 도자기를 교역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504 대청 제국은 이전의 중국 왕조나 이방인들의 정복 왕조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초기의 근대 유라시아에서 독특한 형태의 다민족적/세계적 제국으로서 청 제국은 ‘중국’의 지리적 범위를 확장했고, 몽골족/여진족/티베트족/내륙 아시아의 이슬람교도 등 한족이 아닌 민족들을 새로운 형태의 초월적인 정치적 통일체로 아루르는 놀랄 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점차 한족 지식인들은 중국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그들의 조국으로 인식하게되었다.

청 나라는 상당히 장기간 만주족의 지배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청 나말의 지배계급인 만주족이 소수였다는 점에서 다양한 배경(인종 및 종교 등)의 인재를 선발하는데 한족 중심의 나라들 보다는 훨씬 저항감이 적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전에 조선의 한 선비가 표류해서 강남 지방을 여행하고 남긴 “승사록”이라는 책에서 보면 그곳 식자들과 교류하는 중에 오랑캐(만주족)가 다스리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신해혁명때 만주족에 대한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는 점을 보면, 청나라 말기 만주족이 한족과 동화되었다 하더라도, 민족 구분에 따른 반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식층은 과거제를 통한 정치입문이 유일한 정치 참여의 길이므로, 이를 통해서 만주족의 통치 정당성을 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부분의 한족 관료들은 만주족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으며, 청 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 등에서도 만주족이 세운 왕조를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신해혁명에서는 관료들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데, 어떤 글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에서는 당시 집권세력이 다른 정치체제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지만, 신해혁명 시기에는 공화정이라는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청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 체계를 세운 것이라 표현한다. 이 책에서는 청 나라 말기 외세의 침입 과정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한족 관료가 선택한 결정에 만주족 조정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결정을 뒤집는 것에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난, 이 책의 설명이 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신해혁명 당시에도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는 오리무중이었다. 혁명이후를 생각할 수 있었던 손문이 삼민주의라는 사상을 통해서 청 나라를 대신할 체계를 구상했고, 장개석이 이를 완성한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중국은 청 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웠지만, 광활한 영토, 다민족 국가와 문화의 유산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P 506 청 제국에서 지속된 정치적 특징들 중의 하나는 사회 및 경제의 규모에 비해 공식적인 국가 조직이 비교적 작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정부 체계에서, 많은 준정부적 임무들이 현지 엘리트들(신사, 지역유지, 민변대 지도자, 상업 중개인) 또는 집단들(종족, 촌락, 상인 조합)에게 맡겨졌다. 1720년대 후반에서 1730년대 초반까지의 옹정제 재위 기간에 현지 정부 관리의 밀도가 줄어드는 경향을 반전시키고, 정책 집행을 ‘재정부화(regovermentalize)’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번복되거나 적어도 다음 황제의 재위 시기에 폐기되었다. 청 제국이 세계적 제국으로서의 이미지와 조건을 유지할 수 있는 한, 정부의 존재감이 이렇게 적으면서도 능률적이었던 것이 외부의 위협을 상대적으로 받지 않으면서 실질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건전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이 되면 청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약탈적 국제 전쟁에서 단지 많은 경쟁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고, 이러한 경쟁적인 환경에서 더욱 크고 강력한 개입주의적인 국가 조직이 정치적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청 나라의 특징으로 작은 정부를 강조하고 있는데, 적은 수의 만주족으로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방법이지 않을까한다. 만주족은 팔기를 기반으로한 군사력에 기반을 두고, 더 크고 강력한 정부를 위해 한족의 인력을 늘리기보다는 지방에 권한을 주는 방법으로 대응하는 방법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청 나라 초기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서 초원지대까지 영토를 확장해서 초원지대에서 오는 위협을 제거하여 변경을 안정시켜서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태평성대를 구가했지만, 유라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확장을 통해서 초원지대로 확장하면서, 과거 초원지대에서 오는 위협을 사라졌지만, 경계를 확대해가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산업화를 먼저 이룬 영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하게 되고, 이후에는 같은 아시아에서 산업화를 먼저 이룬 일본에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청 나라가 작은 정부를 통해서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에는 장애물로 작용을 한다. 초원지대로의 확장은 가까운 외부의 위협은 제거되었지만, 내부 단속을 위한 비용 증가를 초래했고, 이는 멀리서 오는 위협에 대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적은 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구조는 다양한 이력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외부 위협에 내부 결속을 만들어내는데는 약점으로 작용했다. 일본은 천황이라는 유명무실하지만, 정통성을 갖는 존재를 통해서 메이지 유신의 구심점으로 삼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뤘지만, 청 나라는 약한 정통성으로 인해 강력한 구심점 역할을 이끌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전에 중국의 만주족 수를 보면서 너무 적은 숫자로 느껴져 청 나라 붕괴시에 아마도 대량 학살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일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청 나라가 이전에 폐쇄적인 나라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 않고,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국력이 약해지는 과정에서 해안을 비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전 명 나라보다 더 대외적으로 활발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명 나라 관련 책도 읽봐야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
Written on September 18, 2020